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강 방어선 전투 (문단 편집) ==== [[인천]] 출동 ==== 당시 이 지역의 군경은 모두가 각 전선 지원차로 출전한 터이라 이의 제압에 손을 쓸 수 없는 실정이어서, 자칫 그곳이 무법천지로 변할 우려가 없지 않았다. 따라서 이 사태가 수원의 육군본부에 급보됨과 동시에 진압이 요청되었다. 이에 육군본부는 19:00에 시흥지구전투사령부로 하여금 [[인천]]에 병력을 파견하여 이를 진압토록 조치한 바 동 사령관 [[김홍일(군인)|김홍일]] 소장은 혼성 제7사단의 수용소에 집결한 제20연대장을 불러『1개 중대를 뽑아 인천으로 출동시켜, 폭동을 진압하라.』라고 명령하였다. 이와 같은 명령을 받은 20연대장 박기병 대령은 곧 파견병력의 차출을 모색하게 되었는데 이때, 26일 밤에 제15연대장 최영희 대령의 통합지휘하에 봉일천 부근에 투입된, 동 연대 제3대대(장, 박희동 소령)의 제12중대가 이날 새벽에 행주에서 강을 건너 18:00에 시흥역 부근에 집결대기중임을 알게 되었다. 연대장이 동 중대의 대오를 점검한 즉 중화기는 모두 강북에 유기하는 바 되었으나 병력과 경장비는 온전한 편이어서 이를 인천으로 출동시키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날 밤중으로 동 중대가 인천을 향하여 밤길을 재촉하게 되었는데 뒷날, 당시 중대장 강영걸 대위는 당시의 상황을 술회하기를, 『이날 아침에 행주에서 강을 건넌 중대가 종일 길을 헤멘 끝에 저녁무렵에야 시흥에 도착하여 비로소 대한부인회가 제공하는 [[주먹밥]] 한덩이씩으로 우선 허기를 메우게 되었다. [[금천구청역|시흥역]] 부근에 집결하여 그곳에서 밤을 새우려고 하는데 연대장 박기병 대령이 와서「피곤하겠지만, 지금 곧 인천으로 가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트럭 5대를 지원받아 한밤중에 병력을 분승시켜, [[인천]]으로 떠나, 그 이튿날 30일 새벽 03:00쯤 인천시가 전방(경인가도상) 2㎞ 지점에서 하차, 도보로 시내에 들어갔다. 이른 새벽 시내에 들어서자, 곳곳에 붉은 벽보가 나붙어 있어, 일견하여 무법천지였다. 민간으로부터 정보를 수집한 즉, 인천 형무소가 파괴되고, 탈옥한 죄수들이 지방좌익분자와 합세하여 난동을 부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의 만국공원 정상에 벽돌로 지은 건물를 점령하여 본부로 정하고 1개 소대를 그곳에 예비로 확보하는 가운데, 나머지 병력으로 시가에 붙은 벽보를 떼면서 탈옥한 죄수들을 색출하였다. 형무소에 갔더니, 당초 동 형무소에 [[소총]] 31정이 있었다고 했으나 회수된 것은 10여정 뿐이었다. 그날 오후에 [[옹진군(황해도)|옹진]]반도에서 철수한 일부[[경찰]]이 집결하였다. [[경기도]] 경찰국에 협조를 구하여 군경이 합동으로 치안확보에 나서, 어느 정도 수습이 되었다. 그때 나는 부두의 유류고와 육군 피복분창 등의 요소 확보에 주안을 두고, 병력을 분산배치하는 한편, 우리가 타고 갔던 트럭 5대에 휘발유의 후송에 전력하였다. 그렇게 하여, 7월 2일까지 인천의 치안을 맡고 있다가 다시 명령에 따라 소사로 이동하여 [[독립기갑연대]] 병력과 함께 적을 막은 다음 3일에 철수하여 [[평택]]으로 갔다.』라고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